들어가며 — 받는 자에게도 붓이 쥐어질 때
여기까지 이 책은 한결같이 받는 자(受)를 말해 왔습니다. 관찰자는 결과를 휘지 않고 받으며(2장), 믿음은 결과가 아니라 나를 바꾸고(3장), 끌어당기지 말고 가다듬으라 했습니다(4장). 算으로 다하고 觀으로 받는 것 — 그것이 받는 자의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옛 성인의 삶에는 받기만 한 것이 아닌 한 자리가 있습니다. 공자가 붓을 들어 『춘추』를 지은 자리입니다. 거기서 그는 세상을 받기만 하지 않았습니다. 한 글자로 신하의 시해를 시해라 적고, 한 글자로 제후의 참람을 참람이라 새겼습니다. 받는 자가 아니라 짓는 자(作)의 자리입니다. 맹자는 그 무게를 이렇게 전합니다 — “공자가 춘추를 지으매 난신적자가 두려워하였다(孔子成春秋而亂臣賊子懼).” 붓 한 자루가 군대보다 무서웠다는 것입니다.
이 장은 묻습니다. 받는 자(觀)의 책에, 짓는 자(作)의 자리는 어떻게 들어올까요. 그리고 그 자리를 양자의 거울에 비추면 무엇이 보일까요.
1. 算 · 觀 · 作 — 두 글자가 세 글자가 되다
이 책의 축은 算과 觀, 두 글자였습니다. 算은 중첩을 닫아 하나의 답에 이르고(用), 觀은 중첩을 무너뜨리지 않고 열어 봅니다(不用). 그러나 공자의 붓을 놓고 보면, 그 사이에 한 글자가 더 있습니다.
양자컴퓨터의 일을 가까이 들여다보면 두 단계가 다릅니다. 하나는 측정 — 다 끝난 상태를 읽어 받는 일입니다. 다른 하나는 측정 이전, 회로를 짜는 일입니다. 틀린 가능성의 물결은 서로 지우고 옳은 가능성의 물결은 서로 키우도록, 문(gate)을 놓아 간섭의 무늬를 빚습니다. 앞은 받음이고, 뒤는 지음입니다.
이 결을 세 글자로 옮기면 이렇습니다.
| 글자 | 행위 | 누구의 자리 | 양자의 거울 |
|---|---|---|---|
| 算 | 중첩을 소진해 답을 냄 | 기계 (主體 없음) | 계산의 전 과정 |
| 觀 | 중첩을 보존한 채 받아 봄 | 받는 자 (受) | 측정 — 읽음 |
| 作 | 한 글자로 평가의 마당을 빚음 | 짓는 자 (聖人·史家) | 회로 설계 — 간섭을 빚음 |
점(占)이 받는 자의 일이라면 — 던져진 효를 받아 읽으니 — 포폄(褒貶)은 짓는 자의 일입니다. 史家는 주어진 사건을 받아 읽되, 거기서 멈추지 않고 한 글자를 놓아 그 사건의 무게를 가릅니다. 받음(觀)과 지음(作)은 한 사람 안의 두 손입니다. 이것이 이 책의 두 글자가 세 글자가 되는 자리입니다.
(다만 거울은 거울일 뿐입니다. 회로의 ’간섭’은 복소수의 위상이 더해지고 지워지는 정확한 물리이고, 춘추의 ’무게’는 도덕의 경중입니다. 닮은 것은 짓는 자가 마당을 빚어 옳은 것을 도드라지게 한다는 행위의 골격이지, 그 안의 셈법이 아닙니다.)
2. 그러나 춘추는 지우지 않는다 — 보존으로서의 심판
여기서 한 가지를 반드시 바로잡아야 합니다. 흔히 “포폄이란 나쁜 일을 지우고 좋은 일이 흐르게 하는 것”이라 여기기 쉽습니다. 양자의 상쇄 간섭이 틀린 물결을 없애듯, 춘추도 악을 없앤다고. 그러나 정확히 반대입니다.
춘추의 붓은 악을 지우지 않습니다. 곧이곧대로 적어(直書) 영원히 남깁니다. 신하가 임금을 죽이면 ’죽였다(弑)’고 못박아 천년 뒤까지 그 이름에 낙인을 새깁니다. 사관 동호(董狐)가 “조돈이 그 임금을 죽였다”고 굽히지 않고 적었을 때, 공자는 그를 일러 “옛날의 어진 사관이다. 글의 법도에 숨김이 없었다(古之良史也, 書法不隱)“고 했습니다. 춘추의 심판은 소거가 아니라 보존이며, 망각이 아니라 낙인입니다.

소옹의 춘추 읽기는 이 인색함을 숫자로 드러냅니다. 경문의 평가는 압도적으로 깎음(貶)에 쏠려, 깎음 312에 기림(褒)은 일곱, 약 마흔다섯 대 하나입니다. 그 깎음은 시해·정벌멸국·참람, 곧 이름과 자리(名分)를 침범한 행위에 집중됩니다. 춘추는 악을 흐려 보내는 책이 아니라, 악의 무게를 정확히 달아 그 자리에 묶어 두는 책입니다.
그러므로 짓는 자(作)의 일은 시크릿의 ’끌어당김’과 정반대입니다(4장). 시크릿은 원하는 것을 불러내고 원치 않는 것을 지운다고 믿습니다 — 以我觀物의 환상입니다. 춘추는 원하든 원치 않든 있는 그대로 무게를 달아 남깁니다 — 以物觀物의 정직입니다. 짓는 자조차 제 뜻대로 역사를 빚지 않습니다. 그는 다만 이미 일어난 일의 무게를, 사사로움 없이, 한 글자에 실어 보존할 뿐입니다.
3. 짓는 자의 함정, 그리고 그 오류정정
여기에 짓는 자의 위험이 있습니다. 한 글자가 그토록 무겁다면, 그 글자에 史家의 사심이 스미는 순간 붓은 흉기가 됩니다. 원하는 답을 끌어당기는 그 以我觀物이, 받는 자의 점에서만이 아니라 짓는 자의 붓에서도 똑같이 도사립니다. 정이천이 蒙卦를 풀며 “거듭하면 모독이니, 모독하면 일러 주지 않는다(再三瀆, 瀆則不告)“고 하여 사심으로 물으면 통하지 않음을 경계한 그 뜻이, 포폄을 두고도 그대로 섭니다.
그렇다면 짓는 자는 어떻게 제 사심을 솎아낼까요. 여기서 양자의 거울이 가장 깊은 한 수를 비춥니다.
양자컴퓨터가 믿을 만한 답을 내려면 두 가지가 절대적입니다. 셈이 정보를 잃지 않아야 하고(유니타리성), 환경이 멋대로 끼어들어 일으키는 어긋남(결잃음)을 계통적으로 솎아내야 합니다(오류정정). 구글 윌로의 ’임계 이하 오류정정’이 바로 그 일입니다 — 통제되지 않은 외부의 사적 개입을 절차로써 빼내어, 셈을 객관에 묶어 두는 것. 객관성이란 ’관점 없음’이 아니라 ’통제되지 않은 사적 개입의 계통적 배제’입니다.
소옹의 춘추는 정확히 같은 조건으로 짓는 자의 사심을 솎습니다. 그는 포폄을 제 마음에 맡기지 않고, 사건을 원회운세(元會運世)의 시간 격자 위에 못박습니다. 元(生)이라는 한 기준에 대고 각 사건이 그 자리에 합당한가를 따지니, 史家 개인의 호오가 끼어들 틈이 줄어듭니다. 그래서 소옹은 손복(孫復)의 ‘깎기만 하고 기리지 않음(有貶無褒)’ — 곧 자의로 흐를 수 있는 포폄 — 을 넘어, 공과를 나란히 세우는 ’기림도 깎음도 있음(有褒有貶)’으로 나아갑니다.
곧 황극경세의 연표는 포폄의 오류정정 장치(裝置)입니다. 사건을 절대 기준의 좌표에 묶는 절차가, 史家의 사심이라는 ’잡음’이 판단에 스미는 것을 계통적으로 차단합니다. 윌로가 잡음을 솎아 객관적 답을 얻듯, 소옹은 私我를 솎아 객관적 포폄을 얻습니다. 짓는 자의 정직은 마음을 비우는 다짐만으로 지켜지지 않습니다 — 비움을 강제하는 절차(격자) 위에서 비로소 지켜집니다.
(이 또한 비유로 읽어야 합니다. 빌려 온 것은 물리의 셈법이 아니라 “객관성=사적 개입의 계통적 배제”라는 조건의 형식뿐입니다. 그 형식이 양자의 회로와 소옹의 연표에 두 번 나타났음을 알아볼 뿐입니다.)
4. 받는 자와 짓는 자는 한 사람이다 — 盡人事와 未濟
이제 짓는 자(作)가 이 책의 한 윤리, 진인사대천명으로 어떻게 돌아오는지가 보입니다.
짓는 자의 붓은 盡人事입니다 — 사람이 할 일을 도덕의 자리에서 끝까지 다하는 것. 史家는 사건의 무게를 사사로움 없이 정확히 달아 한 글자에 실음으로써, 인간의 책임을 다합니다. 그러나 그 붓이 역사의 결말을 정하지는 못합니다. 춘추가 난신적자를 떨게 하여도, 다음 시대가 어디로 갈지는 여전히 열려 있습니다. 역사는 旣濟(다 건넘)가 아니라 未濟(아직 다 건너지 못함)입니다.
여기서 2절의 정직한 교정 — 춘추는 악을 지우지 않고 보존합니다 — 이 깊은 뜻을 얻습니다. 짓는 자가 악을 남기는 까닭은, 닫힌 과거를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열린 미래를 위한 경계(戒)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곤괘(坤) 초육이 서리를 밟고 굳은 얼음이 올 것을 읽어 삼가듯(見幾), 춘추의 직필은 지나간 악을 낙인해 다가올 자가 그것을 밟지 않게 합니다. 보존은 과거를 향한 원한이 아니라 미래를 향한 등불입니다.
그러므로 받는 자와 짓는 자는 둘이 아닙니다. 받는 자는 미정의 하늘을 待天命으로 받고, 짓는 자는 제 할 일을 盡人事로 다합니다. 한 사람 안에서 觀의 손이 받고 作의 손이 새깁니다. 그리고 두 손 모두, 사사로움을 비운 자리(不用·敬)에서만 바르게 움직입니다 — 기계는 그 비움이 없어 셈(算)만 할 뿐 받지도 새기지도 못합니다.

귀결
이 장을 한 문장으로 줄이면 이렇습니다.
받는 자는 결과를 휘지 않고 받고(觀·受), 짓는 자는 무게를 사사로움 없이 새긴다(作·書). 둘 다 私我를 비운 자리에서만 참되며, 그 비움이 算의 기계와 사람을 가른다.
양자컴퓨터는 회로를 빚어(짓듯) 답을 키우고 측정해(받듯) 답을 읽지만, 거기에는 새기는 자도 받는 자도 없습니다 — 빚는 主體도 받는 主體도 없는 純用의 셈일 뿐입니다. 사람의 자리는 그 너머에 있습니다. 받을 줄 알고, 새길 줄 알며, 새기되 지어내지 않고, 받되 끌어당기지 않는 것. 算이 무한해질수록, 그 받음(觀)과 그 새김(作)은 더욱 사람만의 몫으로 귀해집니다.
천 년 전 한 사람이 붓 한 자루로 난신적자를 떨게 했습니다. 그 붓의 비밀은 힘이 아니라 비움이었습니다 — 사사로움을 격자에 묶어 솎아낸 정직. 양자의 시대에도 사람이 끝내 쥐어야 할 것은, 더 빠른 셈이 아니라 그 정직한 붓입니다.
출처·참고
춘추·포폄·작(作)
- 『맹자』滕文公下 “孔子成春秋而亂臣賊子懼”
- 『춘추좌씨전』宣公2년 董狐 “趙盾弑其君”; 공자 평 “董狐, 古之良史也, 書法不隱”(直書의 전거)
- 『사기』太史公自序 “撥亂世反之正, 莫近於春秋”(춘추=바로잡음)
- 『한서』藝文志 “仲尼沒而微言絕, 七十子喪而大義乖”(微言·大義의 어원)
- 손복 『춘추존왕발미』有貶無褒 경향 → 소옹의 有褒有貶 균형(박사 제7장)
- 정이천 『정씨역전』蒙卦 — “初筮告, 再三瀆, 瀆則不告”(私意가 일면 응하지 않음의 뜻); 점·포폄에 두루 적용
소옹·황극경세
- 『황극경세서』元會運世 시간 격자, 元(生) 기준; 춘추 포폄의 객관 수행 → 박사 제7장 (貶312:褒7 정량)
- 體四用三의 不用(소옹) → 서문·1장; “비움을 강제하는 절차”
양자(거울 — 증명 아님)
- 측정(읽음)과 회로 설계(빚음)의 구분; 간섭으로 옳은 진폭을 키움
- 유니타리성·오류정정(QEC)·결잃음(decoherence); 구글 윌로 임계 이하 오류정정
※ 양자와 춘추·포폄의 연결은 이 책 전체와 같이 ’증명’이 아니라 ’비유(알아봄)’로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算·觀·作의 三分에서 양자에 대응하는 것은 행위의 골격이지 물리의 셈법이 아닙니다.
태극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