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이
육사(六四)는 아래 세 효를 지나 마침내 위 괘, 곧 물과 험함의 자리(감坎)로 넘어선 효다. 지금까지가 강을 앞에 두고 기다리는 단계였다면, 여기서는 이미 그 어려운 일 속으로 발을 들여놓았고 상처까지 입었다. ‘수우혈(需于血)’, 피 못에서 기다린다는 말은 더 이상 편안한 대기(待機)가 아니다. 사람이 다치는 자리, 칼부림이 오가는 한복판에 들어섰다는 뜻이다.
그런데 효사는 흉(凶)하다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출자혈(出自穴)’, 구멍에서 빠져나온다고 한다. 육사가 부드러운 음(陰)의 자질로 부드러운 자리에 있어 힘으로 맞서 다투지 않기(부경不競) 때문이다. 힘이 셌던 구삼(九三)은 도적을 불러들였지만, 힘이 약한 육사는 도리어 함정에서 걸어 나온다. 그 비결이 소상전의 ‘순이청(順以聽)’, 곧 순하게 따르며 듣는 데 있다. 밀고 들어오는 힘에 맞서지 않고 “알겠습니다” 하며 길을 비켜 주고, 상황의 흐름을 귀 기울여 듣다가 빠져나갈 틈이 보이면 몸을 빼는 것이다.
변화의 시대를 사는 사람에게 이 효가 건네는 말은 분명하다. 이미 상처를 입었을 때 우리의 본능은 몸을 굳히고 반격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본능이 바로 함정이다. 육사는 살아남는 힘이, 그리고 빠져나오는 길이, 단단해지는 데 있지 않고 부드러워지는 데 있음을 가르친다. 밀려드는 힘을 막으려 하지 말고 그 소리를 듣고(聽) 흘려보내라. 정면으로 받아 내는 자는 그 자리에 묻히고, 순히 듣고 몸을 낮추는 자는 사지에서도 걸어 나온다.
삶에의 적용
오늘 하루, 내 몸 어디가 굳어 있는지부터 살펴보라. 아픈 말, 뒤틀린 일, 잃은 것 앞에서 몸이 먼저 하는 일은 힘을 주어 버티는 것이다. 그러나 물에 빠진 사람이 힘을 빼야 떠오르듯, 험한 상황일수록 저항을 멈추고 숨을 고르며 그 힘을 흘려보내야 탈출구가 보인다. 자세를 낮추고 자존심을 내려놓고, 열린 틈을 듣는다. 물러남은 지는 것이 아니다. 잃은 자리를 손절하고 빠져나오는 그 한 걸음이 흉함을 면하게 한다. 순히 기다리며 틈을 듣는 자가, 뻣뻣한 자들이 묻히는 그 자리를 걸어 나온다.
통찰
힘센 구삼은 도적을 불렀고, 힘 약한 육사는 살아 나왔다. 그 차이가 오직 ‘순이청’, 순하게 듣는 한 마디에 있다. 밀물이 들어올 때 둑을 쌓아 막는 자는 무너지고, 그 물살을 타고 틈으로 빠져나가는 자는 산다. 험한 꼴을 당할 때 자존심을 세우면 그 자리에 묻히고, 납작 엎드려 흐름을 들으면 살아 나온다. 경(敬)으로 삼가고 순(順)으로 따르는 것 — 이것이 험함에 대처하는 오래된 도(道)다.
원문과 주석 — 육사(六四) 경문·소상전과 역대 주석
경문·소상전
六四:需于血,出自穴。 육사는 피 못에서 기다리니(수우혈), 구멍으로부터 나온다(출자혈).
象曰:需于血,順以聽也。 소상전에 이르되, ’수우혈’은 순하여 (때를) 듣기 때문이다(순이청).
정이천 『이천역전』
四以陰柔之質,處于險,而下當三陽之進,傷於險難者也,故云需于血。既傷于險難,則不能安處,必失其居,故云出自穴。順以從時,不競於險難,所以不至於凶也。 4효는 음유의 자질로 험함에 처하고 아래로 세 양이 나아옴을 당하여, 험난함에 상처 입은 자이다. 그러므로 “피에서 기다린다”고 했다. 이미 험난함에 상처 입었으면 편안히 거처하지 못하고 반드시 그 거처를 잃으므로 “구멍에서 나온다”고 했다. 순함으로 때를 따르고 험난함과 다투지 않으니, 흉한 데 이르지 않는 것이다.
출전: 정이천 『이천역전』수괘 육사 전(傳).
주자 『주역본의』
血者,殺傷之地。穴者,險陷之所。四交坎體,入乎險矣,故為需于血之象。然柔得其正,需而不進,故又為出自穴之象。占者如是,則雖在傷地,而終得出也。 ’혈(血)’은 살상하는 땅이요, ’혈(穴)’은 험하게 빠진 장소이다. 4효는 감체(坎)와 사귀어 험함에 들어갔으므로 ’수우혈’의 상이 된다. 그러나 부드러움으로 바름을 얻어 기다리며 함부로 나아가지 않으므로 또한 ’출자혈’의 상이 된다. 점치는 자가 이와 같으면 비록 상처 입는 땅에 있어도 마침내 나올 수 있다.
출전: 주자 『주역본의』수괘 육사.
제가(諸家)
쌍호 호씨(雙湖胡氏): 坎為水、為血。今不曰需于水,而曰需于血,故本義以為殺傷之地。 감(坎)은 물이 되고 피가 된다. 지금 “물에서 기다린다”고 하지 않고 “피에서 기다린다”고 했으므로, 본의(주자)에서 ’살상하는 땅’이라 한 것이다.
운봉 호씨(雲峰胡氏): 三能敬,則雖迫坎之險而不敗;四能順,則雖陷坎之險而可出。敬與順,固處險之道也。 구삼은 능히 공경하므로 비록 감의 험함에 핍박해도 패하지 않고, 육사는 능히 순종하므로 비록 감의 험함에 빠졌어도 나올 수 있다. 경(敬)과 순(順)은 진실로 험함에 대처하는 도이다.
출전: 『주역전의대전』수괘 육사 소주(小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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