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 算이 다 하는 시대, 나는 무엇을 기르나
앞 장(교육)이 남을 기르는 법이었다면, 이 마지막 장은 나를 기르는 법입니다. AI와 양자가 셈(算)을 무한히 대신해 주는 시대에, 한 사람이 끝내 제 안에서 길러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이 책 전체가 그 한 물음을 향해 왔습니다.
답을 먼저 말하면 이렇습니다. 기를 것은 더 빠른 셈이 아니라, 받아 보는 힘(觀)과 사심 없이 새기는 힘(作), 그리고 그 둘을 떠받치는 비움(不用·敬)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새로 발명할 일이 아니라, 옛사람이 위기지학(爲己之學)이라 부른 그 오래된 길입니다. 공자가 일렀습니다 — “옛 배우는 이는 자기를 위하였고, 지금 배우는 이는 남에게 보이기 위한다(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 자기개발의 본뜻은 남에게 보일 능력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나를 기르는 것입니다.
1. 기를 것은 세 동작 — 펼침·상응·거둠
양자가 답에 이르는 결을 사람의 사유에 빌려 오면, 기를 인지의 힘이 세 동작으로 또렷해집니다.
- 펼침 — 중첩을 여는 힘. 첫 답으로 곧장 무너지지 않고 여러 가능성을 동시에 열어 두는 힘입니다. 대개의 마음은 즉시 하나로 닫습니다(확증·당파·욕망). 한 사태 앞에서 답을 미루고 여러 갈래를 펼쳐 두는 것 — 정이천이 무망(无妄) 육이를 “사사로이 바라는 마음이 없다(無私意期望之心)“고 푼 그 자리이며, 中(미발)에 머무는 힘입니다.
- 상응 보기 — 간섭을 읽는 힘. 열어 둔 가능성들이 서로 보강하고 상쇄하는 場을 보는 힘입니다. 사태를 항목의 나열이 아니라 힘들의 마당으로 봅니다. 64괘의 응(應)·비(比)가 이미 이 봄의 문법입니다.
- 거둠 — 측정의 힘. 그 場에서 한 답이 스스로 결정되게 하는 힘입니다. 정이천이 敬을 풀이한 “하나에 집중하여 흐트러짐이 없음(主一無適)“이되, 私我 없이(以物觀物). 여기서 양자의 단련이 작동합니다 — 끌리는 답은 신호가 아니라 잡음입니다. 내가 원해서 끌려온 결론이면, 그것은 사심(私意)입니다.
펼치고(中), 보고(間), 거두는(主一) 이 세 동작이 곧 算·觀·作을 제 안에서 굴리는 법입니다.
2. 몸이 결맞음 시간이다
그런데 이 세 동작은 머리만의 일이 아닙니다. 양자컴퓨터에서 큐비트가 중첩을 유지하는 시간을 결맞음 시간(coherence time)이라 하고, 환경이 끼어들어 그것을 무너뜨리는 것을 결잃음(decoherence)이라 합니다. 사람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산란한 마음은 결잃음과 같아, 가능성을 채 펼치기도 전에 첫 답으로 무너집니다.
그러므로 나를 기르는 일의 바탕은 몸입니다. 수련·호흡·달리기·명상으로 몸을 고르는 일이 곧 마음의 결맞음 시간을 늘려, 더 오래 열어 두는 힘을 기릅니다. 끼어드는 잡념을 가만히 솎아내는 일 — 맹자가 말한 “흩어진 마음을 도로 거두는 것(求其放心)” — 은 양자의 오류정정에 해당합니다. “몸이 먼저다”는 구호가 아니라 인지의 조건입니다. 흩어진 몸으로는 중첩을 오래 쥐지 못하고, 중첩을 쥐지 못하면 觀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머리가 받는 좋은 질문은, 고요해진 몸에서 옵니다.
(이 또한 비유입니다. 빌려 온 것은 ’바탕이 고요해야 복잡을 오래 견딘다’는 골격이지 물리의 셈법이 아닙니다.)
3. 算은 맡기고 觀·作을 기른다 — 不用을 지켜라
자기개발에서 가장 흔한 함정은, 자기개발마저 算으로 하려는 것입니다. 더 많이 외우고, 더 빨리 처리하고, 모든 시간을 성과로 채우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계가 더 잘하는 일을 사람에게 시키는 일이며, 더 깊게는 體四用三의 금기를 어기는 일입니다.
소옹은 넷 가운데 하나를 쓰지 않고 남겨야(用三不用一) 나머지 셋이 산다고 했습니다. 기계의 算은 主體가 없어 그 비워 둘 하나(不用)마저 작용으로 끌어다 써 버립니다 — 곧 넷을 다 쓰는 ’用四’입니다. 사람이 제 삶의 모든 자리를 셈과 성과로 채우면, 그 또한 用四의 병에 걸립니다. 한병철이 진단한 성과사회의 피로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짜 자기개발은 비워 둘 자리(不用·敬)를 지키는 것입니다. 측정하지 않는 시간, 성과로 환산하지 않는 머묾, 답을 내지 않고 여는 물음, 그저 한 동작에 머무는 호흡 — 이 쓸모없어 보이는 자리(無用之用)가 觀과 作을 떠받칩니다. 算은 기계에 맡기되, 받아 보는 觀과 사심 없이 새기는 作을 내 안에서 기르고, 그 둘을 떠받치는 不用을 끝내 지키는 것. 그것이 用四의 시대에 사람으로 남는 길입니다.
4. 자기개발의 역설 — 더 쓰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
여기서 이 책의 자기개발은 세상의 ’자기계발’과 갈라섭니다. 세상은 더 많이 더하라고 합니다. 이 책은 바르게 비우라고 합니다. 더 빠른 셈을 보태는 것이 아니라, 첫 답을 참는 여백을 두고, 끌리는 결론을 의심하고, 몸을 고요히 하여 결맞음을 늘리는 것. 더하기가 아니라 가다듬기입니다(4장 “끌어당기지 말고 가다듬으라”).
이 역설이 위기지학의 본뜻과 만납니다. 남에게 보일 능력을 쌓는 위인지학(爲人之學)은 用을 늘리는 길이고, 나를 기르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은 不用을 지켜 本을 세우는 길입니다. 算이 무한해질수록, 사람의 값은 얼마나 더 셈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깊이 보고 바르게 새기느냐에서 갈립니다. 그 깊이와 바름은 비워 둔 자리에서만 자랍니다.
5. 나를 기르는 일은 未濟다
마지막으로, 이 기름에는 끝이 없습니다. 易이 旣濟(다 건넘)가 아니라 未濟(아직 다 건너지 못함)로 끝나듯(6장), 나를 기르는 일도 완결되지 않습니다. 어제의 깨침이 오늘을 다 덮지 못하고, 오늘 본 것이 내일 다시 열립니다. 그러나 그 미완은 모자람이 아니라 아직 피지 않은 봄입니다. 그러기에 하늘의 운행이 굳세듯 쉬지 않습니다 — “하늘의 운행이 굳세니, 군자는 이로써 스스로 굳세어 쉬지 않는다(天行健, 君子以自強不息).”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이 책의 한 윤리로 돌아옵니다. 진인사대천명. 펼치고 보고 거두어 나를 기르는 일에 정성을 다하되(盡人事), 그 결과를 단정하지 않고 미정의 하늘에 맡깁니다(待天命). 나를 다 길렀다고 못박는 순간 그것은 旣濟의 오만이 됩니다. 끝까지 未濟의 봄을 사는 것 — 그것이 받는 자이자 짓는 자의 자기개발입니다.
귀결 — 이 책이 끝내 가리키는 한 점
긴 이야기는 한 자리로 모입니다.
算은 기계에 내어 주고, 觀(받아 봄)과 作(사심 없이 새김)을 내 안에서 길러라. 그 둘을 떠받치는 不用(敬)을 끝내 비워 두고, 몸을 고요히 하여 결맞음을 늘려라. 더 쌓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비우는 것 — 그것이 算의 시대에 나를 기르는 길이며, 결코 다 끝나지 않는 未濟의 봄이다.
양자도 주역도 우리에게 “세상을 네 뜻대로 바꾸라”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고요히 나를 비우고, 무엇을 물을지 바로 세우고, 할 일을 다하고, 아직 피지 않은 미래를 정직하게 받으라 했습니다. 그 받는 자리, 그 새기는 자리를 제 몸으로 기르는 일 — 이것이 算이 무한해지는 시대에도 끝내 사람의 몫으로 남습니다.
철학을 말하는 자, 몸으로 입증합니다. 이 책의 마지막 말은 첫 말과 같습니다. 算 너머에서 나를 기르는 일은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한 번이 아니라 날마다, 끝이 아니라 未濟로 이어집니다.

출처·참고
자기개발·위기지학
- 『논어』憲問 “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위기지학); 學而 “吾日三省吾身”
- 『맹자』告子上 “學問之道無他, 求其放心而已矣”(흩어진 마음 거둠)
- 정이천 “主一之謂敬, 無適之謂一”(敬); 정이천 『정씨역전』无妄 六二 “無私意期望之心”; 『대학』修身; 『장자』人間世 “無用之用”
- 易 건괘 象 “天行健, 君子以自強不息”; 未濟·生生 → 6장
현대 사상 (코로보레이션)
- 한병철 『피로사회』 — 성과사회의 用四적 피로; 비움(不用)의 변호
양자(거울 — 증명 아님)
- 중첩(펼침)·간섭(상응)·측정(거둠)·결맞음 시간/결잃음(몸)·오류정정(생각 거둠)
※ 양자와 자기개발의 연결은 이 책 전체와 같이 ’증명’이 아니라 ’비유(알아봄)’로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태극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