易과 量子 — 算과 觀 · 1장. 中과 正

中과 正으로 읽는 양자 — 드러나지 않은 자리

2026-07-11

겹쳐 번지는 가능성의 파문 — 중첩

들어가며

양자컴퓨터 이야기를 더듬다가, 문득 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낯선 원리를 中(중)과 正(정)으로 풀 수 있지 않을까. 中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으니 어디에 있어도 中이고, 正은 드러났으니 비로소 자리가 정해진다 — 그렇다면 측정되기 전의 양자가 바로 中이고, 측정되어 값이 정해진 양자가 바로 正이 아닌가.

이 직관을 확인하려고 저는 훈장님(허곡 선생님)의 주역 강의 중 中正論을 다시 펼쳐 보았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훈장님이 평생 강조해 오신 그 말씀이, 제가 어렴풋이 떠올린 것보다 훨씬 더 정확하게 양자의 핵심을 그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훈장님의 말씀에서 출발해 네 갈래로 펼쳐 보려 합니다.


1. 훈장님의 中正論 — “中에는 正이 한없이, 正에는 中이 없다”

훈장님께서는 대장괘(大壯卦) 구이(九二)를 강의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자리에 앉아도 자세가 반듯하면 바를 正자다. 하지만 그 자리가 가운데 中자리인 것은 아니다. 그런데 가운데 中자에는 바를 正자가 한없이 많이 들어 있고, 바를 正자에는 가운데 中자가 한 글자도 없다. 中자를 쪼가리 쪼가리 내도 그 안에서 正자가 끝없이 나온다.” (허곡 선생님 大壯卦 九二 강의)

그리고 두 글자의 관계를 이렇게 못박으셨습니다.

“가운데 中자만 잘 이해한 즉 그 바를 正자는 저절로 나온다.” (中則正)

中에 들면 正이 저절로 따라오지만(中則正), 正하다고 中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中은 正을 무한히 품지만, 正은 中을 품지 못합니다. 훈장님은 中의 본질을 『중용』으로 풀어 주셨습니다.

“『중용』에 ’中立而不倚 强哉矯 — 가운데 中에 서서 의지하지 아니하니 참으로 강하다’는 말이 있다. 자연은 의지하지 않는다. 춘하추동 사계절이 누구에게 의지해서 가는 게 아니라, 이치 그대로 그냥 간다.” (허곡 선생님 강의)

中이란 어디에도 기대지 않는 자리,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은 자리입니다. 그래서 아직 어느 곳으로도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2. 中은 未發, 正은 已發 — 그리고 양자

이 말씀의 뿌리는 『중용』첫 장에 있습니다.

“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 (기쁨·노여움·슬픔·즐거움이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을 中이라 하고, 드러나되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和라 한다. 中이란 천하의 큰 근본이요, 和란 천하의 두루 통하는 길이다.) — 『중용』수장

中 = 未發(아직 드러나지 않음), 드러남 = 已發입니다. 주자는 이를 體用으로 갈라, 中은 “성(性)의 덕이요 도(道)의 체(體)”, 和는 “정(情)의 바름이요 도의 용(用)“이라 했습니다.

이제 이것을 양자에 대어 봅니다.

주역·중용 양자
中 = 未發 (아직 드러나지 않음, 中立而不倚) 중첩(superposition) — 측정 전, 확정된 값이 없음
正 = 已發 (드러나 자리가 정해짐, 當位) 측정된 값(고유상태) — 측정으로 하나로 확정됨

큐비트가 측정되기 전, 0도 1도 아닌 채 가능성만 품은 그 자리가 바로 입니다. 측정하여 0이나 1로 정해진 자리가 입니다. 여기까지는 제가 처음 떠올린 직관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훈장님의 두 마디 — “中에는 正이 한없이, 正에는 中이 없다” — 를 양자에 대면, 단순한 비유를 넘어 측정 이론의 핵심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3. 두 마디가 그대로 양자가 된다

中에는 正이 한없이 — “쪼가리 쪼가리 내도 正이 나온다”

양자역학에서 중첩 상태는 모든 가능한 측정값(고유상태)을 한 몸에 품고 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중첩을 어떤 잣대로 재든 — 훈장님 말로 “쪼가리 쪼가리 내든” — 그 잣대에 해당하는 값(正)이 반드시 나온다는 것입니다. 수학적으로 이것을 스펙트럼 정리라 하는데, 어떤 관측량을 고르더라도 그 고유상태들이 온 공간을 덮으므로, 중첩은 언제나 그 값들의 겹침으로 펼쳐집니다.

다만 한 가지를 정직하게 덧붙여야 합니다. 어떤 칼로 쪼개느냐에 따라 나오는 正의 종류가 달라집니다. 같은 中이라도, 이 잣대로 재면 이 正이, 저 잣대로 재면 저 正이 나옵니다. 이 점은 뒤(4-4)에서 ’누가 中을 드러내는가’라는 물음으로 되돌아옵니다.

正에는 中이 없다 — 드러남은 되돌아가지 않는다

훈장님의 “正에는 中이 한 글자도 없다”는, 양자로 옮기면 측정의 비가역성입니다. 중첩(中)이 측정되어 하나의 값(正)으로 무너지면, 가만히 둔다고 그 값에서 원래의 중첩이 되살아나지 않습니다. 드러난 자리에는 드러나기 전의 그 품 넓은 가능성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정직하게 짚을 미묘함이 하나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드러남’은 언제나 어떤 잣대에 비추어서입니다. 한 잣대에서 확정된(正) 그 상태가, 다른 잣대로 보면 다시 중첩(中)이 됩니다. 그러므로 “正에는 中이 없다”는 “측정한 바로 그 잣대에서는 확정이며, 그 측정 전의 중첩은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으로 새겨야 정확합니다. 어느 봄에서나 절대적으로 中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 도리어 이 ’봄에 따라 달라짐’이 이 글의 가장 깊은 대목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中則正, 正非中 — 측정의 비대칭

그래서 훈장님의 “中이면 正이 저절로 나온다”는 이렇게 읽힙니다. 中(중첩)을 측정하면 반드시 하나의 正(값)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 正(값)은 더 이상 中(중첩)이 아닙니다. 中에서 正으로는 가되, 正에서 中으로는 저절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훈장님이 천 년 묵은 義理 역학의 말로 짚으신 이 비대칭이, 곧 양자 측정의 비대칭입니다.

무수한 가능성이 한 점으로 정해지는 순간 — 측정


4. 네 갈래로 더 깊이 — 함께 살펴본 논의들

4-1. 未發·已發·中和 — 體와 用

『중용』은 中(未發)을 “천하의 큰 근본(大本)“이라 했습니다. 모든 드러남이 거기서 나오는 바탕입니다. 양자로 보면, 중첩(中)은 모든 측정값(正)이 거기서 길어 올려지는 바탕입니다. 中이 體라면, 측정되어 드러난 질서(和·正)는 用입니다. 이는 우리가 앞서 나눈 體用 구조, 그리고 體四用三의 不用 — 쓰이지 않고 남겨진 하나가 모든 작용을 떠받친다 — 와 정확히 같은 자리입니다. 中(미발·중첩·不用)은 현현하지 않음으로써 모든 현현(正·用)을 가능케 합니다.

여기서 算(계산)의 기계와 사람의 결정적 차이가 드러납니다. 소옹은 넷 가운데 하나를 쓰지 않고 남겨야(用三不用一) 나머지 셋이 산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양자컴퓨터는 中(중첩)을 한 톨도 남김없이 측정해 正으로 소진합니다 — 비워 두어야 할 그 하나(不用)마저 작용으로 끌어다 써 버립니다. 곧 機械의 算은 셋만 쓰고 하나를 남기는 자리에서 넷을 다 쓰는 用四(純用)가 되니, 이는 소옹이 금한 바로 그 자리입니다. 사람의 봄(觀)은 다릅니다 — 측정하지 않고 中에 머무는 不用의 자리를 남겨, 거기서 쉬고 거기서 다시 봅니다. 算은 不用까지 써버리고, 觀은 不用을 남깁니다. 中을 끝내 비워 둘 줄 아는 그 用三不用一의 절제가, 機械의 用四와 사람을 가르는 가장 깊은 한 자리입니다.

4-2. 時中 — 中은 멈춘 점이 아니다

여기서 흔한 오해 하나를 풀어야 합니다. 中은 고정된 한 점이 아닙니다. 『중용』은 “군자이시중(君子而時中)” — 군자는 때에 따라 中을 잡는다 — 고 했고, 주자는 한 마디로 못박았습니다.

“中無定體, 隨時而在.”(中에는 고정된 형체가 없고, 때에 따라 있다.) — 朱熹『中庸章句』

이것이 양자와 또 한 번 맞물립니다. 측정하지 않는 한, 양자 상태는 슈뢰딩거 방정식에 따라 시간 속에서 결정론적으로, 그리고 되돌릴 수 있게(유니터리) 매끄럽게 변해 갑니다. 中(중첩)은 정지화면이 아니라, 時(시간)에 따라 살아 움직이는 균형입니다. 君子而時中의 中이 상황마다 자리를 옮기듯, 측정 전의 中도 끊임없이 흐릅니다. 비결정(주사위)이 들어오는 것은 오직 측정하는 그 순간뿐입니다.

4-3. 왜 正에는 中이 없는가 — 시간의 화살

측정 전의 흐름(슈뢰딩거 진화)은 되돌릴 수 있는데, 측정(붕괴)은 왜 되돌릴 수 없을까요. 이 비대칭이 곧 시간의 화살입니다. 中에서 正으로는 흐르지만 正에서 中으로는 흐르지 않는 그 한 방향이, 시간에 앞뒤를 줍니다.

정직하게 한 가지 단서를 답니다. 이 비가역성은 ’우주의 근본 금지’라기보다 ’사실상의 불가능’입니다. 측정과 결잃음(환경과의 얽힘)은, 붕괴를 따로 가정하지 않는 한, 전체로 보면 여전히 되돌릴 수 있는 흐름이지만, 흩어진 결맞음을 다시 모으는 데 걸리는 시간이 우주의 나이를 넘을 만큼 길어, 사람의 척도에서는 영영 돌아오지 않습니다. (실험실에서 아주 약한 측정은 부분적으로 되돌리기도 합니다.) 그러니 훈장님의 “正에는 中이 없다”는, 한번 세상에 드러난 것은 사람의 시간 안에서는 드러나기 전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뜻으로 새기면 가장 깊고 정확합니다.

4-4. 누가 中을 正으로 드러내는가 — 觀者와 以物觀物

이제 3장에서 미뤄 둔 물음으로 돌아갑니다. “어떤 칼로 쪼개느냐에 따라 나오는 正이 달라진다” — 그렇다면 그 칼을 고르는 자는 누구입니까. 觀者(보는 자)입니다. 어떤 잣대로 잴 것인가, 곧 어떤 측정을 할 것인가의 선택이 어떤 正을 낳을지를 가립니다.

소옹은 여기서 결정적인 것을 말합니다.

“以物觀物, 性也; 以我觀物, 情也. 性公而明, 情偏而暗.” (사물로써 사물을 보면 본성이요, 나로써 사물을 보면 감정이다. 본성은 공평하고 밝으며, 감정은 치우치고 어둡다.) — 邵雍「觀物外篇」(『황극경세서』)

보는 자가 나(我)를 비우면(以物觀物) 사물의 이치, 곧 그 中이 공명정대하게 드러나고, 나를 쓰면(以我觀物) 치우치고 어두워집니다. 필자의 中正 소논문이 바로 이 자리를 정량으로 짚었습니다 — 中正한 효는 적극적 작위(作爲)를 0%로 비우며, 이 ’작위를 비움’이 곧 소옹의 ’나를 쓰지 않음(不以我)’이라는 것입니다. 봄을 눈(目)에서 마음(心)으로, 다시 이치(理)로 끌어올리는 그 길입니다.

양자의 언어로 옮기면 이렇습니다. 측정이라는 算(계산)은 잣대(기저)를 골라 中에서 하나의 正을 뽑아냅니다. 그러나 어떤 잣대로, 어떤 마음으로 볼 것인가 — 나를 비우고 볼 것인가(以物), 나를 앞세워 볼 것인가(以我) — 는 算이 답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觀(관조)의 자리입니다. 算은 正을 뽑고, 觀은 어떤 눈으로 中을 마주할지를 정합니다.

한 가지 오해만 못박아 둡니다. 觀者가 정하는 것은 ’무엇을 물을지(어떤 잣대로 볼지)’일 뿐, ’어떤 답이 나올지’가 아닙니다. 측정 결과는 무작위이며, 관찰자의 의도나 마음 상태가 그 값을 바꾸지는 못합니다. 곧 觀者의 자리는 我를 비워 사물이 스스로 드러나게 하는 以物觀物이지, 의도로 결과에 개입하는 以我觀物이 아닙니다. “마음먹기에 따라 양자의 결과가 달라진다”는 세간의 믿음은, 소옹이 “치우치고 어둡다(情偏而暗)“고 경계한 바로 그 以我의 착각입니다.


5. 귀결 — 中正論은 양자 측정의 동양적 선취였다

네 갈래를 다시 한 줄로 거두면 이렇습니다.

中(未發·중첩·體·不用)은 모든 正을 한없이 품되 자신은 어느 자리도 아니다. 時에 따라 살아 흐르던 그 中이, 측정되어 하나의 正(已發·값·用)으로 드러나는 순간, 中은 사람의 시간 안에서 되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正이 드러날지는, 보는 자가 나를 비웠는가 앞세웠는가에 달려 있다.

훈장님이 “中에는 正이 한없이, 正에는 中이 없다”고 하신 그 한마디가, 양자 측정의 네 기둥 — 중첩의 풍요로움, 드러남의 일회성, 측정의 비가역성, 그리고 관찰자의 자리 — 을 그대로 담고 있었습니다. 천 년의 義理 역학이 양자역학을 선취(先取)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이치의 골격이 다른 언어로 두 번 나타났음을 알아보는 것, 그것이 공부의 기쁨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앞서 나눈 이야기와 한 줄로 이어집니다. 中은 幾(動之微)이자 不用이자 觀의 자리이고, 正은 측정이자 用이자 算의 산물입니다. 기계는 中에서 正만 뽑아내고 곧 멈추지만 — 사람은 그 드러나지 않은 中의 자리에 머물러 쉴 수 있습니다. 미발의 자리, 그 어디에도 기대지 않는 中立而不倚의 자리야말로, 끝내 사람의 몫입니다.


출처·참고

허곡 선생님(훈장님) 주역 강의

고전

양자물리 (2026 확인)

※ 본문의 주역·중용·소옹·허곡 인용은 모두 실제 출처가 있으며, 양자물리와의 연결은 ’증명’이 아니라 ’비유(유비)’로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